조선왕소설록

세종 - 에피소드 17: 파저강의 칼 — 최윤덕, 4군의 새벽을 열다

정보알랴주미 2026. 5. 2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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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에피소드 17: 파저강의 칼 — 최윤덕, 4군의 새벽을 열다



세종 13년(1431년), 평안도 도절제사 임명식.

경복궁 사정전,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오는 오후였다.

"최윤덕."

세종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대에게 평안도 도절제사를 맡긴다."

나이 예순을 바라보는 노장(老將) 최윤덕이 무릎을 꿇고 명을 받았다. 그의 이마에는 주름이 깊었지만, 눈빛은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세종은 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압록강 너머에 이만주(李滿住)가 있다. 파저강 일대의 야인들이 해마다 우리 백성을 죽이고 가축을 빼앗는다. 그 땅은 본래 우리가 지켜야 할 땅이거늘, 지금껏 그러지 못하였다."

최윤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신이 반드시 그 땅을 되찾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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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싸움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북방의 지도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압록강 너머 파저강 유역에는 여진족 야인들이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 그 중 이만주는 특히 강성한 추장으로, 해마다 조선 변방을 침략해 백성을 납치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오랫동안 회유(懷柔)를 시도했다. 좋은 말을 해주고, 비단을 보내주고, 때로는 식량도 나눠주었다. 하지만 이만주는 달랬다 하면 또 쳐들어오고, 쳐들어왔다 하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더는 안 된다."

세종이 결단한 것은 바로 그 해였다. 더 이상 달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군대를 보내야 했다.

최윤덕은 평안도에 부임하자마자 정찰을 시작했다. 직접 말을 타고 압록강 연안을 돌아다니며 지형을 눈에 새겼다. 어느 여울이 건너기 쉬운지, 어느 골짜기가 매복에 적합한지 하나하나 기록했다.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가 되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세종 14년, 이듬해 세종 15년의 봄이 올 때까지 최윤덕은 준비를 다졌다.

신하들 중에는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하, 야인들의 땅은 험하고 물자 보급이 어렵습니다. 자칫 무리한 출병은 화를 자초할 수 있습니다."

세종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준비가 부족한 전쟁은 이기고도 지는 법이다. 하지만 세종의 시선은 지도의 압록강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준비가 되면 간다. 아직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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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5년(1433년) 4월, 드디어 때가 왔다.

최윤덕은 새벽에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봄 강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병사들이 허벅지까지 물에 잠기며 강을 건너는 동안,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 이 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저강 어귀에 이르렀을 때, 이만주의 야인 부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돌격!"

최윤덕의 명령 한 마디에 조선 군대가 함성과 함께 쏟아졌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오랜 준비, 노련한 지휘,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는 반드시'라는 결기가 있었다. 이만주의 부락들은 줄줄이 무너졌다. 가옥을 불사르고, 포로를 끌고 돌아왔다. 이만주 본인은 간신히 달아났지만, 그의 세력은 크게 꺾였다.

대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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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승전보가 도착했을 때, 세종은 잠시 눈을 감았다.

기쁨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그 땅 — 압록강과 파저강 사이의 그 땅 — 이 이제 진짜로 조선의 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4군을 설치하라."

여연(閭延), 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 압록강 상류를 따라 네 개의 군(郡)이 새로 세워졌다. 조선의 북쪽 경계가 처음으로 압록강까지 확고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새 땅에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남쪽 도에서 백성들이 이주해 왔다. 척박하고 추운 땅이었지만, 세종은 그들에게 세금을 줄여주고 식량을 지원했다.

"백성이 가면 나라가 간다."

그것이 세종의 생각이었다. 군대가 지키는 땅은 영원히 군대만의 땅이다. 백성이 살아야 비로소 나라 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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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6월, 경복궁에서 또 하나의 잔치가 열렸다.

장영실이 완성한 자격루(自擊漏)를 처음으로 가동하는 날이었다. 자동 물시계 — 시각이 되면 스스로 종을 치고 북을 울리고 인형이 나타나는 정교한 기계. 신하들이 몰려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것으로 온 나라가 같은 시각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장영실이 겸손하게 아뢰었으나, 세종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덕에 조선이 시간을 얻었구나."

파저강의 칼과 자격루의 종소리. 그 해 세종에게는 두 가지 큰 일이 있었다. 하나는 북쪽 땅을 지키는 칼이고, 하나는 백성의 일상을 정밀하게 다듬는 시계였다. 무(武)와 문(文). 세종은 그 둘을 동시에 쥐고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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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세종 16년(1434년), 갑인자(甲寅字)가 완성되었다.

금속활자. 이전에도 활자는 있었지만 이번 갑인자는 달랐다. 훨씬 정교하고, 훨씬 빠르게 찍어낼 수 있었다. 책 한 권을 만드는 시간이 확 줄었다. 지식이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싸게 퍼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같은 해, 함길도 회령(會寧)에 진(鎭)이 설치되었다. 이것은 6진(六鎭)의 시작이었다. 서쪽에 4군이 있고, 동쪽에 6진이 자리 잡으면 — 조선의 북방 경계가 완성된다. 세종의 머릿속에 그 지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최윤덕이 서쪽 파저강에서 칼을 들었다면, 동쪽 두만강에서는 이제 김종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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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저강가의 봄은 이제 조선의 봄이었다.

여연과 자성의 새 고을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올라온 백성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산 너머에서는 아직 야인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조선의 깃발이 펄럭이는 곳에는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최윤덕은 그 땅을 지키며 생각했다.

땅을 얻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임금께서 이 땅의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한, 나도 이 땅을 버리지 않겠다.

압록강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파저강의 물빛도 붉었다. 그것은 싸움의 색이기도 했고, 새 시작의 색이기도 했다.

4군의 새벽이 막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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