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세종 - 에피소드 15: 농사직설 — 우리 땅, 우리 농법, 우리 글

정보알랴주미 2026. 5. 2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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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에피소드 15: 농사직설 — 우리 땅, 우리 농법, 우리 글


세종 11년(1429년) 봄, 경복궁 편전에는 아직 꽃샘추위가 남아 있었다.

"정초."

세종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불렀다.

집현전 부제학 정초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중국 원나라 때 간행된 《왕정농서(王禎農書)》였다.

"그 책이 쓸모 있소?"

정초는 잠시 망설였다. 신중한 사람이었다.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쓸모가 없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나."

"그러나?"

"강남의 농법과 우리 땅의 농법은 다릅니다. 중국의 기후는 우리보다 온난하고, 토질도 다르며, 강수량도 다릅니다. 그들의 벼 심는 법을 그대로 따르면, 우리 땅에서는 절반도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세종은 무릎 위에 얹은 손을 꽉 쥐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조선의 농민들은 해마다 가뭄과 홍수, 냉해와 싸우며 살았다. 국가는 농사를 독려했지만, 그 농사법은 죄다 중국 책에서 온 것이었다. 조선의 산과 강, 조선의 흙과 바람을 알지 못하는 책들이었다.

"그렇다면."

세종이 천천히 말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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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는 그날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짝은 변효문—실무에 밝고 발이 빠른 관리였다. 두 사람은 팔도의 노농(老農)들을 찾아다녔다. 경상도의 밭작물 장인, 전라도의 논농사 고수, 함경도의 두만강변에서 밭을 일군 노인까지. 수십 년을 흙과 씨름한 이들이었다.

"씨앗은 언제 뿌리십니까?"
"모는 몇 치 간격으로 심으십니까?"
"가뭄이 들면 어떻게 버팁니까?"

노인들은 처음엔 의아해했다. 관리가 왜 농부한테 고개를 숙이는가.

하지만 정초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받아 적었다. 먹이 번지도록 적었다. 밤새 정리하고, 이튿날 다시 확인하러 갔다.

경상도 노인이 말했다.

"아, 우리 동네는 찰벼를 심을 때 못자리를 열흘 늦게 합니다. 강에서 찬 기운이 오래 머물거든요."

정초의 붓이 빠르게 움직였다.

전라도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물꼬를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벼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지요. 제 시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셨는데…"

정초는 그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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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2년(1430년) 2월, 《농사직설(農事直說)》이 완성되었다.

얇고 소박한 책이었다. 화려한 장정도, 긴 서문도 없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것은 조선 팔도의 흙내음이었다. 벼·기장·조·콩·보리—각 곡물의 씨앗 고르는 법부터 심는 때, 거름 주는 법, 수해와 가뭄에 대처하는 법까지. 중국 책이 아닌, 조선의 농부들이 몸으로 터득한 지식들이었다.

세종은 책을 손에 들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직설(直說)."

제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바로 말한다.' 꾸미지 않고, 어렵지 않게, 농부들이 쓸 수 있도록 쓴 책.

"잘 되었소."

짧은 칭찬이었다. 그러나 정초는 그 한마디에 1년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책은 즉시 인쇄되어 팔도 감사(監司)들에게 배포되었다. 각 고을의 관아에 비치되고, 향리들이 농민들에게 읽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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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종의 마음에는 작은 가시 하나가 남아 있었다.

《농사직설》은 한문으로 쓰였다. 관리들은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그들이 직접 읽을 수 있는가?

세종 22년(1440년), 농사직설은 전국 각 도에 추가 인쇄되어 다시 한 번 보급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했다. 글을 아는 농부는 드물었다. 책은 관아에 꽂혀 있었고, 논밭의 농부에게 닿기까지는 또 다른 사람의 입을 거쳐야 했다.

세종은 어느 날 밤 홀로 촛불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농사직설》이 펼쳐져 있었다. 그 옆에는 백성들이 올린 상소문들—한문을 모르는 백성을 대신하여 향리가 대필한 것들이었다.

'백성이 글을 알지 못한다.'

생각이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아무리 좋은 책을 만들어도, 아무리 바른 법을 만들어도, 백성이 스스로 읽지 못한다면—그것은 반쪽짜리였다. 관리를 통해야 하고, 향리를 통해야 하고, 또 누군가의 입을 통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왜곡이 생기고, 빠지는 것이 생기고, 닿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세종은 붓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아직 세상에 없는 글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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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사람들은 훈민정음 창제의 이유를 여러 가지로 말할 것이다.

형사 재판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백성들. 나라의 법을 알지 못해 죄를 짓는 이들. 중국 한자가 조선말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

하지만 세종의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그 봄날의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정초가 팔도를 돌며 노농들의 말을 받아 적던 것. 그 지식을 책으로 만들었지만, 정작 농부들은 읽지 못했던 것. 우리 땅의 농사법을 담은 우리의 책이 우리 백성의 손에 온전히 닿지 못하는 그 아이러니.

농사직설은 씨앗이었다.

우리 땅에 맞는 우리 농법을 처음 문자로 담은 씨앗. 그 씨앗을 심고 나서야 세종은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씨앗을 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씨앗을 읽는 법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그 생각이, 13년 뒤 스물여덟 자를 만들어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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