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세종 - 에피소드 16: 9만 8천 對 7만 4천 — 조선 최초의 여론조사, 공법

정보알랴주미 2026. 5. 2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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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에피소드 16: 9만 8천 對 7만 4천 — 조선 최초의 여론조사, 공법



세종 12년(1430년) 여름, 경복궁 편전.

어좌 앞 바닥에는 두루마리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지방 관아에서 속속 올라온 문서들이었다. 황해도에서 온 것, 전라도에서 온 것, 함길도 깊은 산골에서 온 것까지. 어떤 것은 먹이 번져 글씨가 흐렸고, 어떤 것은 종이가 구겨진 채로 도착해 있었다.

세종은 그 두루마리들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찬성이 구만 팔천이백사십육. 반대가 칠만 사천백사십구."

그가 숫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편전 안의 신하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그리고 호조판서와 여러 참판들. 저마다 표정이 달랐다.

"전하, 찬성이 더 많으니 공법을 시행하면 될 것이옵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세종은 고개를 들었다.

"찬성이 많다고 그것이 옳은 것이오? 칠만 사천이 반대했소. 그들은 왜 반대했겠소?"

편전이 조용해졌다. 신하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임금이 묻는 것이 수사학적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오래전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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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2월, 세종 12년 봄에는 또 다른 일도 있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이 완성되어 반포된 것이다. 조선의 풍토에 맞는 우리만의 농법을 정리한 책이었다. 중국에서 들여온 농서가 아니라, 조선의 실제 농민들에게 물어 모은 지식이었다. 세종이 직접 각 도의 노농(老農)들에게 오랫동안 경험으로 쌓아온 농법을 조사하게 한 뒤 정리한 책이었다.

공법 여론조사와 《농사직설》,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백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들어야 한다는 마음. 하늘 아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땅을 일구는 사람들이 가장 정확한 답을 알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이 임금을 서재에서 끌어내어, 들판으로, 백성의 목소리가 담긴 두루마리로 이끌었다.

공법(貢法)이란 무엇인가.

조선의 세금 제도는 복잡하고 불공평했다. 그해 농사가 어떠냐에 따라 세금을 달리 매기는 손실답험법(損實踏驗法)이 기본이었다.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다니며 수확량을 가늠해 세율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이론적으로는 공정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탐관오리의 천국이었다.

관리가 마음에 드는 농부에게는 흉년 판정을, 미운 농부에게는 풍년 판정을 내렸다. 뇌물이 오가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세금을 피하려는 농부와 뇌물을 요구하는 관리 사이의 추악한 거래가 매년 반복되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난한 백성에게 돌아갔다. 뇌물을 낼 여력조차 없는 이들이 가장 억울한 세금을 냈다.

세종은 오래전부터 이것을 뜯어고치고 싶었다. 그 대안이 공법이었다. 토지 1결(結)당 일정한 양의 곡식을 고정 납부하는 제도. 관리의 자의가 끼어들 틈이 없는, 단순하고 명확한 세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토지마다 비옥도가 다르고, 지역마다 기후가 달랐다. 경기도 옥토와 함길도 척박한 땅에 같은 세율을 매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그해 농사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고정 세율을 내야 한다면 농민은 굶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반대 측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세종은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백성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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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에 명이 내려졌다. 양반부터 농민, 향리까지 모든 이에게 공법에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의견을 적어 올리게 하라.

조정 대신들은 어리둥절했다. 임금이 백성의 의견을 묻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더구나 향리와 농민까지 포함하다니. 예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위계가 세상의 질서였다. 위에서 아래로 명이 내려가는 것이지, 아래의 목소리가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전하, 하천(下賤)의 의견을 어찌 조정 정사에 쓰리이까."

황희가 낮게 말했다. 반대가 아니라, 우려의 목소리였다. 이 노대신은 평생 수많은 임금을 섬겼다. 태종의 냉혹함과 세종의 부드러움을 모두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명령은 처음이었다.

"이 법은 하천의 밭에서 걷는 세금이오. 그들의 밭이 어떤지, 그들이 어찌 살고 있는지, 그들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세종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결정을 내리고 나서야 발표하는 임금답게.

황희는 더 말하지 않았다. 영의정을 수십 년 한 노대신도 이 임금 앞에서는 할 말이 없는 경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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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뒤, 전국에서 답변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경상도 어느 농부는 찬성 의견을 냈다. "매년 관리가 와서 밭을 보는데 그때마다 곡식을 바쳐야 하니 차라리 일정하게 내는 게 낫다"고 했다. 함경도 어느 향리는 반대였다. "이곳은 기후가 고르지 않아 풍흉이 심하다, 같은 세율이라면 흉년에 굶어죽을 사람이 나온다"고 했다.

어느 고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함께 의논한 뒤 답변을 썼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글 아는 사람이 이웃들의 말을 대신 써준 것이었다. 이름 모를 농부들의 목소리가, 한양 궁궐 편전의 두루마리 더미 속에 담겨 있었다.

전라도에서 온 두루마리 하나에는 글씨가 유난히 삐뚤삐뚤했다. 글을 잘 모르는 사람이 힘겹게 쓴 것이 분명했다. 세종은 그것도 펼쳐 읽었다. 찬성이라는 글자 아래, "세금만 가볍게 해주십시오"라는 말 한 줄이 덧붙어 있었다. 공법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쓴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한 줄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최종 집계가 나왔다. 찬성 구만 팔천이백사십육. 반대 칠만 사천백사십구. 십칠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응답한 셈이었다. 어떤 왕도 전례 없는 숫자였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처음으로 백성의 목소리를 숫자로 헤아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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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전하."

호조판서가 물었다.

세종은 두루마리 더미를 바라보았다.

찬성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반대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게다가 반대한 사람들의 이유가 설득력이 있었다. 척박한 땅, 기후 변화, 흉년의 위험.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 밀어붙이면 법이 오히려 백성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었다.

"당장 시행하지 않겠소."

편전이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포기하지도 않겠소. 반대한 칠만 사천이 왜 반대했는지, 그 이유를 하나하나 해결하는 방법을 찾겠소. 토지의 등급을 나누고, 지역마다 다른 기준을 만들고, 흉년에 대비하는 방법도 마련해야 하오. 그것이 다 갖춰지기 전까지는 서두르지 않겠소."

황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 숙임에는 반박이 아니라, 존경이 담겨 있었다.

세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루마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글씨가 삐뚤삐뚤한, 전라도 농부의 것이었다. 그것을 함부로 내려놓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직접 어탁(御卓) 위에 올려두었다. 이름 없는 농부의 목소리가 임금의 책상 위에 놓이는 순간이었다.

"이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소. 가벼운 세금이오. 공평한 세금이오. 우리가 만들어야 할 법이 바로 그것이오."

공법 논쟁은 그 이후로도 8년을 더 이어진다. 세종 14년에 호조가 8조 시안을 내놓고, 세종 20년에 이르러서야 충청·경상·전라 3도 일부에서 시범 시행이 시작된다. 한 법을 고치는 데 꼬박 십 년이 걸렸다.

세종은 서두르지 않았다. 구만 팔천의 찬성보다, 칠만 사천의 반대를 먼저 생각한 임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가진 가장 평범한 덕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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