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6년(1424), 가을.
봉상시(奉常寺) 판관 박연(朴堧)이 사정전 앞에 엎드린다.
쉰을 갓 넘은 나이. 머리는 반백, 손은 늘 두 가지 색이다. 한쪽은 먹이 묻어 있고, 한쪽은 옥(玉)을 깎느라 손톱 밑이 부예진다.
문관이라는데 문관 같지가 않다. 악공(樂工)이라기엔 너무 글을 안다.
세종이 어전에 든 박연을 한참 본다.
"박 판관."
"예, 전하."
"네가 며칠 전 올린 상소를 다시 읽었다."
박연이 잠시 숨을 멈춘다.
"…삼가 듣겠나이다."
세종은 자기 무릎 위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다.
"우리나라 음악이 종률(鍾律)에 맞지 않다. 종묘에 종을 울려도 그 종은 우리 음을 알지 못하고, 사당에 경을 쳐도 그 경은 우리 율을 모른다. 임금이 제(祭)를 지내며 듣는 그 소리가, 결국 빌려온 소리이다 — 너는 이리 적었다."
박연이 머리를 더 깊이 숙인다.
"…삼가, 그러하옵니다."
세종은 그 종이를 가만히 다시 본다.
***
옆에 시립한 황희(黃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전하. 음악은 예부터 명나라에서 들여와 왔습니다. 종묘제악의 새 정비라 함은… 사대(事大)에 비추어 가벼이 다룰 일이 아닌 듯하옵니다."
세종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황 영의정. 한 가지를 묻자."
"…말씀하소서."
"제(祭)를 지낼 때, 제사를 받는 분이 누구인가."
황희가 잠시 머뭇거린다.
"…태조(太祖) 이하 열성조이옵니다."
"열성조는 어느 땅 사람이신가."
황희가 천천히 대답한다.
"…조선 땅 사람이옵니다."
"조선 땅 사람을 모시는 음악이, 어찌 다른 땅의 음에 맞아야 하겠는가."
사정전이 한순간 조용해진다.
박연이 그 침묵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 이 임금은 정말로 알아듣는다.
***
세종이 다시 박연을 본다.
"박 판관."
"예, 전하."
"네가 청한 율관(律管) 제작, 윤허한다. 종묘제악의 정비, 네 손에 맡긴다."
박연이 그 자리에 그대로 엎드린다.
"…전하. 신, 죽기 전 이 한 가지를 위해 살겠나이다."
세종이 옅게 미소 짓는다.
"죽지 마라. 일이 길다."
***
세종 12년(1430), 봄.
육 년이 흘렀다.
박연의 머리는 이제 거의 흰 눈빛이다. 손에는 굳은살이 자리잡았다. 옥을 자르고, 대나무를 다듬고, 황종 한 음을 잡기 위해 그가 깎아 버린 율관이 헤아릴 수 없다.
그가 사정전에 다시 든다.
이번에는 빈손이 아니다.
비단으로 싼 긴 함을 두 사람이 들고 들어온다. 그 안에는 새로 정비한 종묘제악(宗廟祭樂)의 악장(樂章)이 들어 있다.
세종이 친히 함을 연다.
악보의 첫 줄, 박연의 글씨가 단정하다.
— 永觀(영관). 우리 종조(宗祖)께 올리는 첫 노래.
세종이 그 첫 줄을 한참 본다. 그리고 박연에게 묻는다.
"한 번 들려다오."
***
며칠 뒤, 종묘 뜰.
악공들이 새 악장에 맞추어 자리를 잡는다. 편종, 편경, 축(柷), 어(敔), 부(缶). 박연이 친히 지휘봉을 잡는다.
세종은 옥좌가 아닌 자리, 종묘 뜰 한쪽 마루에 평상복 차림으로 앉는다.
— 임금이 아니라, 다만 듣는 한 사람으로.
박연이 손을 든다.
축(柷)이 처음으로 울린다.
— 텅.
편경이 그 뒤를 따른다.
— 차…앙.
편종이 한 박자 늦게 가세한다.
— 두웅.
세종이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낯설다.
지난 수십 년간 들어 온 명의 아악(雅樂)과 다르다. 더 무겁고, 더 가깝다. 그 소리가 자기 가슴 속 어딘가, 평소에 닫혀 있던 한 칸을 두드린다.
— 이것이 우리 음(音)인가.
세종의 손등에 옅게 핏줄이 돋는다.
마지막 음이 길게 사위어 든다. 종묘 뜰이 다시 조용해진다.
세종은 한참 동안 눈을 뜨지 않는다.
박연이 손을 내린 채 임금을 본다. 그의 등이 미세하게 떨린다.
세종이 천천히 눈을 뜬다.
"박연."
"예…, 전하."
"내,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음을 빌려 조상을 모셨다."
박연이 숨을 멈춘다.
"오늘에야, 비로소 내 음으로 내 조상을 모셨다."
박연의 무릎이 그 자리에서 꺾인다.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쉰여섯의 늙은 악공의 어깨가 잠시 흔들린다.
***
세종 13년(1431), 늦봄.
박연이 마침내 황종(黃鍾) 율관을 완성한다.
황종 — 모든 음의 어머니. 이 한 음이 맞아야, 그 위에 열두 율(律)이 차례로 잡힌다. 이 한 음이 흔들리면, 모든 음악이 흔들린다.
세종은 그 율관을 직접 본다.
대나무로 빚었다. 길이는 정확히 아홉 치(寸). 안지름도, 두께도, 천 번을 깎아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세종이 그 율관을 가만히 손바닥에 얹는다.
"불어 보아라."
박연이 입에 율관을 댄다.
긴 숨이 들어가고, 한 음이 빠져 나온다.
— 깊고, 흔들림이 없고, 끝없이 곧다.
세종이 옅게 웃는다.
"이 음이 우리의 황종이로구나."
박연이 무릎을 꿇는다.
"전하. 이 음이 곧 조선의 표준음이옵니다. 이제 종묘, 문묘, 사직 어느 자리에서도 이 음 위에 모든 음을 세울 수 있나이다."
세종이 천천히 일어선다.
그 율관을 두 손으로 받쳐 든다.
"박연."
"예, 전하."
"네가 평생을 들여 잡은 이 한 음이, 천 년 뒤에도 조선의 귀를 깨워 줄 것이다."
박연이 그 자리에서 다시 엎드린다.
이번에는 울지 않는다. 다만 두 손이, 가만히 떨릴 뿐이다.
***
그날 저녁.
세종은 사정전으로 돌아와 홀로 앉는다.
책상 위에는 박연이 두고 간 율관 모형이 한 줄로 놓여 있다. 황종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 열두 율이 차례로 늘어선다.
세종은 그 한 줄을 가만히 손가락 끝으로 따라간다.
— 글이 백성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 글은 아직 우리 글이 아니다.
— 음이 우리 가슴에 닿지 않는다면, 그 음은 아직 우리 음이 아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잠시 스친다.
— 글도 그렇지 않을까.
세종은 그 생각을 가만히 갈무리한다. 아직 입 밖에 낼 때가 아니다.
다만 박연이 평생을 들여 한 음을 잡았듯, 자기도 언젠가 우리 가슴에 가장 가까운 글을 잡고 싶다는 마음이, 그 밤 사정전 책상 위에서 작은 율관의 그림자처럼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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