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세종 - 에피소드 9: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 — 세종, 진정한 친정을 시작하다

정보알랴주미 2026. 5. 1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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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에피소드 9: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 — 세종, 진정한 친정을 시작하다



졸곡(卒哭)이 끝나는 날 새벽이다.

세종 4년 10월, 경복궁 사정전. 시종이 옷을 한 겹씩 올린다. 흰 도포(白衣), 검은 사모(烏紗帽), 흑각대(黑角帶). 상복도 아니고 곤룡포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의 옷이다.

"전하, 이제 시사(視事)를 보셔도 됩니다."

세종은 거울 속 자신을 한참 본다. 스물여섯. 즉위한 지 사 년이 지났지만, 오늘에서야 그는 처음으로 '혼자' 정사를 본다는 사실을 안다.

아버지가 없다.

지난 사 년, 그의 곁에는 늘 상왕 태종이 있었다. 군사권도, 인사권도, 끝내 외척의 목숨을 거두는 일까지도 부왕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세종은 옥좌에 앉아 있었으나, 진짜 임금은 수강궁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수강궁이 비었다.

빈자리는 슬프면서도, 무겁다.

세종은 천천히 정전으로 나아간다. 신하들이 부복한다. 그가 입을 연다.

"호패법을 손보겠소. 백성이 어디 사는지, 무엇을 짊어졌는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다스릴 수 있소. 전국의 토지를 다시 재겠소."

호조판서가 조심스레 묻는다. "전하, 큰 일이옵니다. 상왕께서 계실 적에도…"

세종이 말을 끊지 않고, 다만 조용히 받는다.

"상왕께서 계시지 않으니, 내가 하겠소."

신하들이 숨을 멈춘다. 처음 듣는 어조다. 부드럽되 물러서지 않는, 묻되 이미 정한 자의 목소리.

그날 오후, 세종은 변경 방어 체계를 점검한다. 명나라 황제가 북쪽 몽골을 친다는 소식이 들어와 있다. 국경이 흔들리면 조선도 흔들린다.

"평안도와 함길도가 흉년으로 굶고 있다지요. 군사를 논하기 전에 백성부터 먹입시다. 곡식을 보내시오. 변방을 지키는 건 성벽이 아니라 거기 사는 사람들이오."

저녁, 세종은 집현전으로 향한다. 부왕이 떠난 뒤 그가 처음으로 마음 놓고 찾은 곳이다. 젊은 학자들이 등불 아래 책을 펴고 있다. 세종이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오늘은 정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오래된 생각 하나를 묻고 싶소."

학자들이 붓을 내려놓는다.

"백성이 글을 모르오.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 사정을 적지 못하고, 나라가 가르치려 해도 받아 적을 길이 없소. 나는… 백성을 가르치는 일(訓民)을 제대로 해 보고 싶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겠소?"

한 학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다. "전하, 그것은… 참으로 큰 길이옵니다."

세종이 웃는다. 오랜만의 웃음이다. "큰 길이니 오래 걸리겠지요. 그러니 오늘부터 걷는 게 좋겠소."

훗날 훈민정음으로 이어질 첫 불씨가, 그렇게 등불 아래에서 조용히 켜진다.

겨울이 온다. 11월, 동지(冬至) 하례가 열린다. 졸곡 뒤 맞는 첫 큰 행사다. 예조에서 음악을 갖추겠다 아뢰지만 세종이 고개를 젓는다.

"아버님이 떠나신 해요. 풍악은 아끼겠소. 예는 갖추되, 마음은 검소하게."

대신 세종은 무신들을 직접 부른다. 변방에서 온 장수들의 거친 손을 보며 국경의 사정을 듣는다. 그리고 서운관(書雲觀)을 정비하라 명한다. 하늘을 읽는 곳이다.

"농사는 하늘에 달렸소. 그런데 우리는 하늘을 짐작만 하고 있소. 비가 언제, 얼마나 오는지조차 제대로 적지 못하지 않소. 하늘을 더 정확히 읽을 방도를 찾으시오."

이 한마디가 훗날 측우기와 간의(簡儀)로 자라날 씨앗이라는 걸, 그 자리의 누구도 아직 모른다.

12월, 친정 첫해가 저문다. 세종은 한 해를 돌아본다. 호패와 토지, 변방의 곡식, 집현전의 등불, 하늘을 읽는 일. 작은 일들이지만 모두 '그의' 색깔이다. 부왕의 그늘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들.

윤12월, 한 해의 끝자락. 태종의 신주(神主)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 절차가 논의된다. 세종은 그 보고를 받고 한동안 말이 없다. 그날 밤, 그는 붓을 들어 시 한 수를 적는다. 아버지를 향한 사모(思慕)다.

권력자로서의 태종, 아들을 위해 외척의 피까지 손에 묻힌 아버지 태종. 미움도 그리움도 한데 엉킨 그 마음을, 세종은 시로밖에 풀지 못한다.

붓을 내려놓으며 세종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아버님, 이제 그림자가 없습니다. 빛도, 어둠도, 다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새해가 밝아온다. 세종은 신하들 앞에서 분명히 말한다.

"올해부터 친정을 본격적으로 펴겠소. 누구의 그늘도 아닌, 이 나라 임금의 정치를."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에, 한 임금이 비로소 똑바로 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조선의 가장 빛나는 시대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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