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2년의 봄이 늦게 왔다.
한양의 남산엔 아직 잔설이 희끗했고, 경복궁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살얼음 같은 침묵을 깨고 있었다. 즉위한 지 두 해째. 스물네 살의 임금은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밤이 깊어도 등잔불을 끄지 않았다.
"전하, 또 밤을 지새우셨습니까."
내관 김 씨가 조심스레 들어와 새 기름을 부었다. 세종은 책장을 넘기다 잠깐 고개를 들었다.
"호구가 다시 줄었네. 영남에서만 이천 가구가 사라졌어."
"흉년 탓이옵니다."
"흉년만이 아니지. 도망간 백성도, 숨겨진 백성도 있을 게야."
세종은 붓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새 임금이 가장 먼저 손댄 일은 호구 조사였다. 백성을 정확히 알아야 세금도, 군사도, 흉년 구휼도 가능했다. 하지만 숫자는 들춰낼수록 뼈아팠다. 토지 제도는 어지러웠고, 권세가의 농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경연이 열렸다. 세종은 《예기(禮記)》를 펴 들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예란 무엇인가."
집현전 학사 정인지가 답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그릇이옵니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 채울 수 있다. 짐의 그릇은 아직 비어 있는가, 차 있는가."
신하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임금이 묻는 방식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그러나 평온한 책상의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한양에 빠른 파발이 들이닥쳤다. 함길도에서 올라온 장계였다.
"여진족 기병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경원성 외곽이 불탔고, 경성진의 봉수가 끊겼습니다."
편전이 일순 얼어붙었다. 세종은 장계를 두 번, 세 번 읽었다.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몇이나 되더냐."
"오백을 헤아린다 합니다. 활과 도끼로 무장하고, 말을 갈아타며 빠르게 움직인답니다."
"민가는."
"이미 셋이 불탔고, 끌려간 백성이 마흔이 넘는다 하옵니다."
세종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즉위 이래 처음 마주하는 변경의 비명이었다. 백성이 끌려갔다. 그 단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그날 밤, 세종은 상왕 태종이 머무는 수강궁으로 향했다.
태종은 화로 앞에 앉아 군용 지도를 펼쳐 놓고 있었다. 늙어가는 호랑이의 눈이었다. 병색이 짙어 안색은 잿빛이었지만, 지도 위를 짚는 손가락만은 칼날처럼 정확했다.
"오셨소, 주상."
"아바마마. 북변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태종은 잠시 말없이 화롯불을 들여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진은 한 부족이 아니요. 우디거(兀狄哈), 오도리(吾都里), 우라(烏剌)… 부족마다 셈법이 다르지. 한 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들고 일어나오. 짐이 평생 다뤄 본 자들이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두 가지요. 활과 화포. 그리고 한 가지 더."
태종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임금의 마음이오."
세종은 잠자코 그 말을 곱씹었다. 임금의 마음.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화포는 어디까지 왔는가, 주상."
"군기감에서 새 화포의 시험을 마쳤습니다. 사거리가 옛 것의 두 배이고, 한 번에 다섯 발을 쏠 수 있다 하옵니다."
태종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좋군. 변방에 보내시오. 여진이 활을 들 때, 우리는 천둥을 들도록 하시오."
***
세종은 곧장 명을 내렸다.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새 화포 스물 문을 보내고, 경성과 경원의 성벽을 다시 쌓도록 했다. 두만강 연안의 봉수를 두 배로 늘리고, 남쪽에서 올라간 군량은 사흘 안에 도착하도록 했다. 가장 빠른 파발마가 밤낮없이 북으로 달렸다.
그러나 세종의 진짜 명은 다른 데 있었다.
"끌려간 백성을 반드시 찾아오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신하들이 머뭇거렸다.
"전하, 적진 깊숙이 들어가는 일은 위험하옵니다."
"백성 한 사람의 목숨이 어찌 짐의 안위보다 가벼우랴. 화포로 길을 열고, 사람으로 길을 메워 데려오라."
편전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임금의 음성은 낮았지만, 단단했다. 결단을 내린 사람의 목소리였다.
***
칠월. 두만강 일대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여진 기병이 다시 강을 건너 경원성으로 몰려들었다. 함길도 조선군은 새로 받은 화포를 성루에 올려놓고 그들을 기다렸다. 새벽안개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다가오는 동안, 도절제사 하경복은 짐을 정돈하는 군사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백성을 더 잃을 것이 두려울 뿐이다. 살아라. 살아서, 끌려간 사람들을 데려오라."
해가 안개를 갈랐다. 화포의 천둥이 두만강을 흔들었다. 첫 발에 여진 기병의 선두가 흩어졌고, 두 번째 발에 그들의 깃발이 꺾였다. 활을 든 부대가 측면에서 쏟아져 나가고, 보병들이 강가의 갈대밭에서 함성을 질렀다. 기병들은 말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엔 도망치게 두지 않았다.
조선군은 강을 건너 추격했다. 적의 진영을 태우고, 끌려갔던 백성을 한 사람, 두 사람, 데리고 돌아왔다. 마흔둘 가운데 서른여덟이 살아 돌아왔다.
***
팔월, 한양 경복궁 근정전.
승전 보고를 받은 세종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모두가 환호하기를 기다렸지만, 임금은 다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서른여덟이로구나."
"전하, 큰 승리이옵니다."
"네 사람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 네 사람의 이름을 모두 적어 가지고 오라. 그 가족들에게 짐이 직접 글을 쓰겠다."
신하들이 숙연해졌다.
세종은 그제야 공신들을 돌아보았다. 함길도 도절제사 하경복에게 비단과 말을 내리고, 화포를 다룬 군기감 장인들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화포는 무기이지만,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잊지 말라."
***
며칠 뒤 경연. 세종은 《대학(大學)》을 펼쳤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짐은 어디까지 왔는가."
집현전의 어린 학사들이 답하지 못했다. 세종은 빙긋 웃었다.
"짐도 모르네. 다만 오늘 한 가지는 알았다. 임금의 결단이 늦으면, 백성의 목숨이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
***
구월, 명나라 사신이 도착했다. 그들은 조선의 변방 승전을 이미 듣고 있었다. 사신단의 우두머리는 정중히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조선의 임금이 어리지 않으시구려."
세종은 미소만 지었다. 외교의 자리에서는 자랑하지도 비굴하지도 않는 법, 그것을 그는 즉위 두 해 만에 이미 익히고 있었다. 사대(事大)는 머리를 숙이는 일이 아니라, 등 뒤의 백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사신이 돌아가는 길, 세종은 조용히 신하들에게 일렀다.
"북방의 파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막았으나, 내일은 또 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부터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수강궁 화로 앞의 늙은 호랑이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었다 한다.
새 임금이, 마침내 자기 발로 서기 시작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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