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19년 5월,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새벽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바닷가 마을에 비명이 터진다.
"왜놈이다! 왜놈이 또 왔다!"
쉰 척이 넘는 왜선이 검은 그림자처럼 해안으로 밀려든다. 칼을 빼든 왜구들이 마을을 휩쓸고, 곡식과 사람을 닥치는 대로 끌어간다. 도두음곶(都豆音串)에서 만호 김성길이 활을 들고 맞서다 그대로 쓰러진다. 병사 삼백 명이 채 한나절을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끌려간다.
비인현이 통째로 잿더미가 되었다는 보고가 한양으로 달려온다. 파발마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한밤중에 광화문을 두드린다.
***
수창궁(壽昌宮), 상왕전.
쉰셋의 태종이 보고서를 내려놓는다. 이미 왕위는 세종에게 넘겼지만, 군국의 대권(大權)만은 아직 그의 손에 있다.
"…삼백이라."
목소리에 살기가 묻어난다. 곁에 선 어린 임금 세종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아바마마,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태종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짙은 눈썹 아래로 형형한 눈빛이 번뜩인다.
"주상, 짐이 묻겠소. 도적이 제 집 마당에 와서 사람을 죽이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주인이 어디 있겠소?"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요. 저들의 굴혈(窟穴)을 쳐야 하오. 뿌리째 뽑아야 하오."
세종이 숨을 삼킨다. 태종이 말하는 곳, 그곳은 바다 건너 대마도(對馬島). 수백 년간 조선의 옆구리를 쑤셔 온 왜구의 본거지다.
"그러나 아바마마, 바다를 건너 정벌함은 일찍이 없던 일이옵니다. 풍랑과 역병이 두렵습니다."
"두려워서 안 가면, 저놈들은 내년에도 오고 후년에도 오지요. 짐의 손주의 손주까지 저놈들에게 시달려야 한단 말이오?"
태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어둠을 바라본다.
"짐이 평생 칼로 살았소. 형제도 베고, 처남도 베고, 신하도 베었소. 마지막 칼은… 왜놈에게 박아 두고 가야겠소."
세종의 눈에 물기가 차오른다.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그 말을 내뱉는지 안다. 자신의 치세에 평화의 바람이 불도록, 아버지는 마지막 폭풍을 자처하고 있다.
***
며칠 뒤, 편전(便殿).
문무백관이 도열한 가운데 태종이 군령을 내린다.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를 명한다. 이종무(李從茂)!"
쉰여섯의 노장이 한 걸음 나서 무릎을 꿇는다. 갑주를 두른 어깨가 묵직하다.
"신, 명을 받자옵니다."
"중군절제사 우박, 이숙무, 황상. 좌군절제사 박초, 박실. 우군절제사 이지실, 김을화, 이순몽. 모두 이종무의 휘하에 둔다. 경상·전라·충청 삼도(三道)의 병선을 모두 거제도에 모아라."
서리가 받아 적는 붓끝이 떨린다. 동원되는 병선이 이백이십칠 척, 군사가 일만 칠천이백팔십오 명. 조선이 개국한 이래 단 한 번도 띄워 본 적 없는 규모의 함대다.
"기한은?"
"유월 십칠일! 그날 거제도에서 출항한다. 만일 기한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태종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차갑게 잇는다.
"군법으로 다스린다. 도주든, 절제사든, 예외 없다."
이종무가 머리를 깊이 숙인다.
"신, 목숨으로 받들겠나이다."
***
## 6월 17일, 거제도(巨濟島) 견내량.
새벽 다섯 시. 바다 위로 붉은 햇덩이가 떠오른다.
이백이십칠 척의 병선이 일제히 닻을 올린다. 돛이 펼쳐지는 소리가 한꺼번에 들리는 순간, 마치 거대한 짐승이 숨을 들이쉬는 것 같다. 만호의 깃발이 펄럭이고, 병사 일만 칠천여 명의 함성이 바다를 흔든다.
"닻을 올려라! 노를 저어라!"
이종무는 기함(旗艦) 위에 서 있다. 백발 섞인 머리에 투구를 눌러썼고, 손에는 도체찰사의 부절(符節)이 쥐여 있다. 그가 한 손을 들자 뒤에 있던 모든 배가 출항을 시작한다.
"장군, 풍향이 좋습니다!"
박실이 다가와 보고한다. 이종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왜놈이 우리가 오는 줄 안다면 도망갈 것이고, 모른다면 기습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간다."
함대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린다. 거제도가 점점 멀어지고, 수평선 너머로 대마도의 검은 윤곽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
## 6월 20일, 대마도 두지포(豆知浦).
두지포의 왜구들이 아침을 맞는다. 바다는 평소처럼 잔잔하다. 한 어부가 그물을 던지려다, 문득 수평선에서 무언가를 본다.
"…저, 저게 뭐냐?"
검은 점이 둘, 셋, 열, 백… 끝없이 늘어난다. 어부가 그물을 내던지고 마을로 달려간다.
"배다! 조선의 배다! 수백 척이다!"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宗貞盛)는 마침 본도(本島) 쪽에 있어 자리에 없다. 남은 왜구들이 황급히 칼을 들지만, 이미 늦었다.
조선 함대가 두지포로 쏟아져 들어온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고, 화통(火筒)에서 불꽃이 튄다. 정박해 있던 왜선 백이십구 척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다.
"전부 불태워라! 한 척도 남기지 말라!"
이종무의 명령이 떨어진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는다. 왜구들이 산속으로 도망친다. 조선 군사들은 해안의 가옥 천구백여 호를 모조리 부수고 불을 놓는다.
피랍됐던 명나라 사람과 조선 사람들이 줄지어 풀려난다. 한 노인이 이종무 앞에 엎드려 울부짖는다.
"장군… 십 년 만이외다. 십 년 만에 우리 땅 군사를 봅니다…"
이종무는 차마 그 손을 잡지 못하고, 고개만 깊이 숙인다.
***
## 6월 26일, 대마도 이로군(尼老郡).
엿새가 지나도록 왜구의 본대(本隊)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산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친다. 좌군절제사 박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산을 오르다, 매복에 걸려 큰 손실을 입는다.
전사 백여 명. 조선 함대 출항 이래 첫 큰 패배다.
이종무가 잠시 눈을 감는다. 박실이 죽을 죄를 청하며 부복한다.
"체찰사, 신이 부덕하여…"
"되었네."
이종무는 단호히 자른다.
"우리 목적은 왜의 멸절(滅絶)이 아니다. 본거지를 부수고, 다시는 조선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두려움을 새기는 것이다. 이미 백 척을 태웠고, 천 호를 무너뜨렸다. 충분하다."
그는 돛대를 올려다본다. 하늘이 흐려지고 있다. 칠월의 바다는 변덕스럽다. 태풍이 한 번 몰아치면, 일만 칠천 명이 모두 수장(水葬)될 수도 있다.
"대마도주에게 글을 보내라."
***
서신은 짧고도 단호하다.
"너희가 대대로 조선의 변경을 침범하니, 이에 천병(天兵)이 와서 응징하노라. 항복하면 살리고, 거절하면 너희 섬을 풀 한 포기 남기지 않을 것이다."
소 사다모리는 이 서신을 받아 들고 한참을 떨었다 한다. 그는 곧 항복의 뜻을 전한다. 앞으로 조선을 형으로 섬기겠다, 왜구를 단속하겠다, 다시는 변경을 범하지 않겠다.
이종무는 답한다.
"좋다. 그 약속, 기억하라."
***
## 7월 3일, 거제도로 귀환.
함대가 다시 거제도에 닿는다. 출항할 때와 거의 같은 수의 배, 같은 수의 군사가 돌아온다. 큰 풍랑은 없었다. 하늘이 도왔다.
소식은 한양으로 날아간다.
수창궁의 태종은 보고서를 펼쳐 들고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입을 연다.
"…되었구나."
곁에 있던 세종이 묻는다.
"아바마마, 무엇이 되었습니까?"
태종이 아들을 바라본다. 그 눈빛에는 더 이상 칼날이 없다. 다만 깊고 깊은 피로와, 옅은 안도가 있다.
"주상의 시대가 시작될 자리를 닦아 놓았소. 이제부터 그대는, 백성을 살리는 정치를 하시오. 짐이 평생 베어 온 만큼, 그대는 살리시오."
세종이 무릎을 꿇고 부친의 손을 잡는다. 늙은 손은 차갑다.
대마도 정벌. 조선 개국 이래 첫 외정(外征). 그리고 태종이라는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휘두른 칼.
이 칼 한 자루로, 이후 백 년간 조선의 남쪽 바다는 잠잠하게 된다.
폭풍을 자처한 아버지가, 잔잔한 바다를 아들에게 물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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