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 원년(1419년) 여름, 한양의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덮여 있었다.
경복궁 편전, 세종 이도(李祹)는 서안(書案) 앞에 앉아 보고문을 펼쳤다. 충청도에서 왜구선이 출몰했다는 긴급 전갈이었다. 그의 눈썹이 가늘게 좁아졌다. 왜구. 오랜 세월 조선의 해안을 괴롭혀 온 이름. 아버지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근절하지 못한 숙제였다.
"전하, 상왕 마마께서 부르십니다."
내관의 목소리에 세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즘 부왕 태종의 건강이 심상치 않았다. 목에 종양이 생겨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사만큼은 절대 놓지 않았다.
상왕전에 들어서자 태종이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눈으로 세종을 바라봤다. 야윈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서슬 퍼렇게 살아 있었다.
"앉거라."
세종이 공손히 자리를 잡자 태종이 입을 열었다.
"대마도다."
단 세 글자였다. 하지만 그 무게는 산처럼 무거웠다.
"왜구의 소굴이 어딘지 모르는 척하지 마라. 씨앗을 뽑아야 꽃이 피지 않는다. 내가 이종무(李從茂)에게 명을 내렸다.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대마도를 정벌한다."
세종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벌. 그것은 전쟁이었다. 즉위한 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자신의 치세에 대규모 원정이 단행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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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6월부터 조선 팔도는 전쟁 준비로 들끓었다. 병선이 건조되고, 군량이 비축되고, 각 도에서 군사가 속속 집결했다. 이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것은 태종이었다. 세종은 경연(經筵)에서 《대학》을 읽으며, 자신이 아직 아버지의 그늘 아래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7월 초, 마침내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병선(兵船) 227척. 군사 1만 7,285명.
거제도 앞바다에 집결한 조선 함대는 장관이었다. 이종무 장군이 기함(旗艦)에 우뚝 서서 대마도 방향을 응시했다. 파도가 거세게 흰 포말을 일으켰다.
"출정!"
북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227척의 병선이 일제히 뱃머리를 남쪽으로 돌렸다. 조선의 수군이 쓰시마 해협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초반 전투는 순조로웠다. 조선군은 대마도 해안 여러 곳을 공략하며 왜구의 선박을 불태우고 포로를 잡아들였다. 승전보가 한양으로 날아들었다. 세종은 부왕의 얼굴에서 오랜만에 만족의 기색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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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쟁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8월, 니로(仁位)의 산악 지형으로 깊이 들어간 조선군은 복병을 만났다. 익숙한 지형을 이용한 대마도 군사들의 기습이었다. 조선군 일부가 패퇴했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종무는 결단을 내렸다. 철수.
한양에서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한동안 침묵했다. 책임론이 떠올랐다. 애초에 무리한 원정이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세종은 아버지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군사 작전의 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태종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깊이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태종의 목소리에는 자책도, 변명도 없었다. 다만 냉정한 판단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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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예상치 못한 소식이 들어왔다.
대마도 도주(島主) 종정성(宗貞盛)이 항복 표문(表文)을 보내왔다.
"다시는 왜구 행위를 하지 않겠습니다. 조선에 복속하겠습니다."
세종은 그 문서를 받아 천천히 읽었다. 승리도 아니었고, 완전한 패배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진짜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군사적 위압으로 협상 테이블을 만드는 것.
10월, 조선은 종정성의 항복을 공식 수락했다. 무역을 재개하되, 조건이 붙었다. 왜구 활동 금지, 제한된 무역항 개방,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은 선박만 왕래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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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그날 저녁 혼자 편전에 앉아 촛불을 바라봤다.
기해동정(己亥東征). 완전한 정복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마도는 이제 조선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 왜구의 소굴은 이제 조선의 관리를 받는 복속지가 되었다.
아버지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 결실은 자신의 치세 위에 쌓이게 될 것이다.
세종은 천천히 붓을 들었다. 배워야 할 것이 아직도 많았다. 전쟁도, 외교도, 백성을 다스리는 일도. 아버지의 그늘은 길고 깊었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만의 빛을 밝힐 날이 올 것이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세종은 눈을 가늘게 뜨고 불꽃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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