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태종 — 에피소드 1: 피로 얻은 왕좌 — 태종 이방원, 즉위하다

정보알랴주미 2026. 4. 2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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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 에피소드 1: 피로 얻은 왕좌 — 태종 이방원, 즉위하다



서기 1401년, 음력 정월 초하루.

한양 궁궐의 하늘이 아직 먹빛으로 가라앉아 있을 때, 이방원은 이미 눈을 뜨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잠이 들 수가 없었다.

곤룡포 자락이 낯설었다. 옥좌가 낯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낯선 것은 이 정적(靜寂)이었다. 칼소리도 없고, 말발굽 소리도 없고, 비명도 없었다. 오직 새벽바람이 처마를 스치는 소리만이 궁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형들의 피가 내 손에 묻어 있다.*

아니다. 이방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방석은 죽었고, 이방번도 죽었다. 정몽주도 죽었다. 그리고 그 모든 죽음 위에 지금 이 왕좌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太宗) 이방원.

그는 옷깃을 여미고 정전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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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정월 초하루, 태종은 먼저 태상왕(太上王) 이성계의 처소로 향했다. 아버지. 한때 천하를 호령하던 그 노인은 지금 신암사(神巖寺)로 불사를 보러 가고 없었다. 이방원은 부드럽게 표리(表裏)를 올리고 돌아왔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전하, 군신들이 경하를 올리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승지 박석명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이방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전에는 조정의 모든 신료가 도열해 있었다. 붉고 푸른 관복의 물결이 겨울 햇살 아래 출렁였다. 이방원은 곤면(冕服)을 갖추고 옥좌에 올랐다.

"천세\! 천세\! 천천세\!"

산호(山呼) 소리가 궁궐을 흔들었다. 이방원은 조용히 그 소리를 받아들였다. 화려했다. 장대했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그 소리 너머로 다른 무언가가 들리는 것 같았다.

형들의 목소리였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원망이었을까.

그는 모른 척 앞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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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열흘이 지났을 무렵, 태종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정빈(貞嬪) 민씨를 정비(靜妃)로 책봉하라."

민씨. 그 여인은 이방원이 세자도 아니었던 시절부터, 심지어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창졸(倉卒)한 밤에도 갑옷을 준비하고 병사를 불러모아 남편을 지원했다. 조선 건국의 혁명 속에서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방원의 뒤를 받쳐온 여인이었다.

책봉 의식에서 태위(太尉) 권근이 옥책(玉冊)을 낭독했다.

"왕화(王化)의 기틀은 반드시 규문(閨門)의 올바름에서 시작되고, 종사(宗祀)의 혈통은 실로 배필의 높음에 달려 있나이다. 정빈 민씨는 그윽하고 정숙하며, 성실하고 단장하며, 머리를 묶고 예를 올린 이래 집안을 다스리는 덕을 일찍부터 보여왔으며, 창졸한 때에 결단하여 갑옷을 구하시니, 종사의 공을 이루는 데 보필하였사옵니다."

민씨는 조용히 책봉을 받았다.

태종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실록은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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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날,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다.

조회(朝會)에서 상장군(上將軍) 이응(李膺)이 반열(班列)에서 자리를 잘못 서는 일이 있었다. 사헌부에서 탄핵을 올렸다. 별것 아닌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태종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입을 열었다.

"이것은 필시 민무구(閔無咎)가 사헌부를 부추겨 한 짓이다."

신하들이 멈칫했다.

민무구. 태종의 처남이었다. 왕비 민씨의 오빠, 즉 국왕의 동서(同壻). 그가 궁중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을, 태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응은 원래 민무구, 민무질(閔無疾) 형제와 친했다. 그런데 왕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돌아서서 민씨 형제를 왕에게 참소하기 시작했다. 민씨 형제는 분했다. 그래서 이응을 엿먹이려고 사헌부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이 태종의 판단이었다.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불러 직접 꾸짖었다.

"총애가 극에 달했으면 마땅히 삼가야 할 것이오."

민무구 형제는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표정은 공손했지만, 눈빛은 달랐다.

태종은 그 눈빛을 기억했다.

*저들을 언젠가는 처리해야 한다.*

그 생각은 씨앗처럼 가슴 한켠에 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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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팔월의 어느 날, 태종은 뜻밖의 소식 앞에 멈추었다.

"전하, 왕자께서 훙(薨)하셨나이다. 춘추 두 살이옵니다."

갓 두 살 된 왕자였다. 이름도 채 갖지 못한 아이.

태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성대한 장례를 치르자고 청했다. 그러나 태종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하상(下殤)에 이르지도 못했거늘, 어찌 성례(盛禮)를 쓰겠는가."

조회를 이틀간 정지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왕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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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팔월, 태종은 중요한 제도를 하나 만들었다.

신문고(申聞鼓).

이전에 등문고(登聞鼓)라고 불리던 북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있다면 — 신분을 막론하고, 이 북을 치면 왕에게 직접 하소연할 수 있게 하는 제도였다.

의정부에서 규정을 만들어 올렸다.

"경외(京外)의 하소연할 곳 없는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되, 소재 관사(官司)에서 받아주지 않을 경우, 신문고를 치는 것을 허락한다. 그 일은 헌사(憲司)에서 추문하여 결단하되, 사사로운 원한으로 무고(誣告)한 자는 반좌(反坐)로 처벌한다."

태종이 이 제도를 만든 이유는 단순하지 않았다. 백성에 대한 연민도 있었겠지만, 동시에 지방 관리들이 함부로 백성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감시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 왕이 직접 백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통로였다.

신하들의 눈과 귀를 거치지 않고.

"이제 백성 중 억울한 자는 이 북을 치도록 하라."

태종은 조용히 선언했다. 그리고 그 북 소리가 궁궐 안에 처음으로 울려 퍼지던 날, 그는 오랫동안 그 소리를 들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칼과 피만이 아니라, 이 북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

피로 얻은 왕좌 위에서, 이방원은 조선을 자신의 나라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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