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세종 - 에피소드 28: 최만리의 분노 — 사대와 우리 글의 갈림길

정보알랴주미 2026. 6. 1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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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 에피소드 28: 최만리의 분노 — 사대와 우리 글의 갈림길



세종 26년(1444년) 2월, 집현전 교리청에 때아닌 정적이 흐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활기로 가득했다. 임금이 직접 내린 명이었다. 교리 최항, 부교리 박팽년, 부수찬 신숙주와 이개, 그리고 돈녕부 주부 강희안까지—집현전의 젊고 명민한 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국의 운서 《운회(韻會)》를 새로 만든 글자, 언문(諺文)으로 옮기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 작업을 지켜보고 감독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동궁(東宮, 훗날의 문종)과 진양대군, 안평대군이었다.

처음에는 다들 어리둥절했다. 임금이 작년 겨울부터 홀로 방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설마 그것이 '글자'였을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동그라미와 세모, 가로선과 세로선이 결합된 낯선 기호들. 그것이 한자도 아니고 몽골 문자도 아닌, 오직 조선말의 소리만을 위해 만들어진 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젊은 학자들의 눈은 빛났다.

"이것으로 《운회》를 옮겨보라."

세종의 명은 짧았지만 무게는 산처럼 무거웠다. 운서란 한자의 음을 정리한 책으로, 사대부 학문의 근간이다. 그것을 새 글자로 옮긴다는 것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이 글자가 학문의 영역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첫 시험대였다.

그런데 바로 그 일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최만리는 조용히 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전하께서… 새 글자를 만드셨다고?"

그는 곁의 동료에게 되물었다. 동료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만리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가 평생을 바쳐 섬긴 것은 성리학과 중화의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을 담는 유일한 그릇인 한자였다. 그런데 임금이, 그것도 단 한 마디 의논도 없이, 조선말의 소리를 그대로 베껴 적는 글자를 '친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것은 사대(事大)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다."

최만리는 그날 밤, 등불 아래에서 붓을 들었다.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집현전의 원로와 중진들을 차례로 찾아가 뜻을 모았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운 만류였다. 그러나 의논이 거듭될수록 말은 단호해졌다.

"중국은 글자가 통일되어 있어 천하의 문명을 하나로 묶는다. 그런데 우리만 따로 글자를 만든다면, 이는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길이다."

"이두(吏讀)만으로도 관아의 문서는 충분히 통한다. 굳이 새 글자가 필요한가."

"새 글자가 쉽다면, 누구나 그것만 익히고 어려운 한문 학문은 멀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리학의 도(道)는 누가 잇는단 말인가."

"형벌을 다루는 관리들이 이두로도 죄인의 사정을 충분히 살필 수 있는데, 새 글자로 옥사의 기록을 따로 만든다 한들 억울함이 사라지겠는가. 문제는 글자가 아니라 사람이다."

며칠 뒤, 상소문이 완성되었다. 여섯 명의 이름이 나란히 적힌 그 상소는 길고 정연했으며, 한 글자 한 글자에 평생 쌓아온 학문적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최만리는 마지막으로 붓을 들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손끝이 차가웠지만, 그는 이것이 신하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 믿었다.

상소가 올라가던 날, 경복궁 사정전 안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가라앉았다.

세종은 상소문을 천천히, 끝까지 읽었다. 옆에서 시중을 들던 내시는 임금의 얼굴에서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한 줄, 한 줄을 읽어 내려가는 임금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종이를 내려놓는 손끝에는 분명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정창손, 신석조, 하위지—이 셋을 들라 하라."

부름을 받은 세 사람은 사정전 앞에 엎드렸다. 평소라면 학문을 논하던 자리였으나, 오늘은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너희가 상소에 이르기를, 언문이 학문에 방해가 된다 했다."

세종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 안에는 억누른 분노가 분명히 흐르고 있었다.

"하면 묻겠다. 너희는 운서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며, 그 음의 갈래가 어찌 나뉘는지 답할 수 있느냐?"

세 사람은 입을 열지 못했다. 운서의 음운 체계를 글자 하나하나의 이치까지 따져 묻는 임금의 질문에, 평생 경서만을 파고든 그들로서는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따져보지도 않고, 어찌 이 글자가 음을 옮기는 데 부족하다 단언하느냐. 너희가 진정 학문을 안다면, 먼저 이 글자가 어떤 이치로 만들어졌는지를 살핀 뒤에 옳고 그름을 논해야 할 것이다."

세종의 음성이 점점 날을 세웠다.

"내가 이 글자를 만든 것은 한순간의 흥이 아니다. 수년간 음운을 연구하고, 내 눈이 흐려질 때까지 자모의 모양을 그려가며 다듬은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단 한 번도 그 이치를 들여다보지 않고, '오랑캐의 글'이라 한마디로 잘라 말한다. 이것이 학자의 도리인가."

정창손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 신들은 다만… 중화의 법도를 어지럽힐까 염려하였을 뿐이옵니다."

"염려라 했느냐."

세종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백성이 글을 몰라 자신이 무슨 죄로 끌려가는지조차 모른 채 매를 맞는다. 법전이 있어도 읽을 수 없으면 그것은 그들에게 법이 아니다. 나는 그 백성들에게 말과 같은 글을 주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찌 중화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이란 말이냐."

좌중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세종은 끝내 정창손, 신석조, 하위지를 의금부에 가두라 명했다. 단 하루 만에 풀려나긴 했으나, 그 하룻밤은 집현전 전체에 차가운 경고로 남았다.

최만리는 옥에 갇힌 그날 밤, 작은 창 너머로 새어드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의 그 단호한 눈빛, "백성에게 글을 주겠다"던 그 한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집현전의 등불은 다시 켜졌다. 그러나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새 글자를 둘러싼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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