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세종 - 에피소드 27: 비밀의 작업 — "이달,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다"

정보알랴주미 2026. 6. 12. 16:23
반응형



경복궁 깊은 밤, 천추전 옆 작은 서재에 불빛 하나가 꺼지지 않는다.

세종 25년(1443년) 겨울, 모두가 잠든 시각인데도 임금의 방에서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내시 하나가 문밖에서 조심스레 묻는다.

"전하, 야심하셨사옵니다. 침수에 드시지 않으시옵니까?"

"아직이다. 물러가 있으라."

세종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하다. 그는 며칠 전부터 안질이 도져 눈이 시큰거리고, 글자가 흐릿하게 번져 보인다. 그런데도 촛불 아래서 손을 떼지 못한다. 책상 위에는 누구도 본 적 없는 낯선 그림들이 가득하다. 동그라미, 세모, 가로선과 세로선이 짝을 이루며 빼곡히 적혀 있다. 한자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다.

"ㄱ, ㄴ, ㄷ, ㄹ……"

세종은 혼자 입속으로 소리를 내며 입 모양을 따라 해본다. 혀가 입천장에 닿는 모양, 입술이 다물리는 모양, 목구멍에서 소리가 울리는 모양. 그는 자신의 입과 혀와 목을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소리의 생김새를 그리고 있다.

이 작업을 아는 사람은 궁궐 안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집현전의 노련한 학자들도, 평소 세종의 모든 정사를 함께 논하던 대신들도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오직 둘째 아들 진양대군과 막내 광평대군, 그리고 몇몇 가까운 이들만이 임금의 방에 밤새 불이 켜져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숨기는가.

세종은 알고 있다. 이 일이 알려지는 순간, 조정 전체가 뒤집어질 것을. 한자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다. 그것은 사대부의 권위이며, 중국과 통하는 문명의 언어이며, 수백 년을 이어온 질서 그 자체다. 그런데 임금이 "백성들도 쉽게 쓸 수 있는 글자를 따로 만들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문자 개혁이 아니라 그 질서를 흔드는 일이 된다.

세종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함길도의 한 백성이 한문으로 적힌 소장(訴狀)을 들고 관아 앞에서 어쩔 줄 모르며 서 있던 모습. 글을 모르는 백성은 자신이 무슨 죄로 끌려가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매를 맞고, 억울함을 풀 길도 없이 옥에 갇혔다. 형옥을 다스리며 "한 사람도 억울하지 않게 하라"고 명했던 세종이지만, 정작 그 명령조차 글을 모르는 백성에게는 닿지 않았다.

"법을 알아도 읽을 수가 없으니, 그것이 법인가."

세종은 종종 그렇게 중얼거렸다. 한문은 익히는 데 적어도 수년이 걸린다. 평생 농사만 짓는 백성에게 그런 시간이 있을 리 없다. 사대부의 자제들도 어릴 때부터 글공부에 매달려야 겨우 따라가는 것이 한자다. 그런데 이 나라 백성의 대다수는 그 글자의 세계 바깥에 산다. 말은 있으나 그 말을 적을 길이 없는 사람들.

"우리말과 중국말은 다르다. 그런데 어찌하여 중국의 글자로만 우리말을 적으라 하는가."

세종은 이 단순하지만 누구도 정면으로 묻지 않았던 질문을 붙들고 몇 해를 보냈다. 그는 음운학 서적을 파고들었고, 중국의 음운 이론을 공부했으며, 사람의 입과 목과 혀가 소리를 만드는 원리를 연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소리에는 생김새가 있다는 것을.

혀가 윗니 뒤에 닿아 막혔다가 터지는 소리, 입술이 붙었다가 열리는 소리,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소리. 세종은 이 소리들의 '모양'을 그대로 글자의 모양으로 옮기기로 했다. 어려운 획을 외울 필요도 없고, 뜻을 따로 익힐 필요도 없다.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 그 글자가 곧 소리가 된다.

"이것이라면… 누구든 며칠 안에 깨칠 수 있다."

세종은 처음으로 옅은 미소를 띤다. 옆에서 함께 자모를 정리하던 둘째 딸 정의공주가 조심스레 묻는다.

"아버님, 정말 이것으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사옵니까? 우리말뿐 아니라, 한자음, 심지어 짐승의 울음소리까지도요?"

"그래. 바람 소리도, 닭 우는 소리도, 적고자 하면 적을 수 있다. 이것은… 소리의 그릇이다."

그날 이후로도 작업은 계속된다. 자음 열일곱과 모음 열한 자, 합하여 스물여덟 자. 세종은 종이 위에 자모를 하나씩 써 내려가며 소리를 내고, 다시 지우고, 다시 쓴다. 어떤 글자는 수십 번을 고친다. 입 모양을 본뜬 기본자에서 획을 더해 거센소리를 만들고, 점을 더해 콧소리를 표시한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습을 본뜬 둥근 점과 가로선, 세로선으로 모음을 만든다. 자음과 모음을 합쳐 한 음절을 이루면, 그것이 곧 우리가 말하는 소리 그대로가 된다.

겨울이 깊어가던 어느 밤, 세종은 마지막 글자를 써넣고 붓을 내려놓는다. 손이 떨린다. 눈은 진작부터 시큰거리며 눈물이 맺혀 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오랜 시간 짊어졌던 무게를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되었다……"

그는 스물여덟 개의 글자를 다시 한번 천천히 짚어본다. ㄱㄴㄷㄹㅁㅂㅅ…… 그리고 아래로 모음들. 단순하지만, 이 단순함 속에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이 무렵, 사관은 실록에 짧은 한 줄을 적어 넣는다. 별다른 설명도, 거창한 수식도 없는 단 한 줄.

"이달,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그것이 전부였다. 마치 날씨를 기록하듯 무심하게 적힌 그 한 줄은, 그러나 훗날 이 나라의 말과 글, 그리고 백성들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을 사건의 기록이었다. 글자는 옛 전서를 본떠 만들었으며, 초성과 중성과 종성으로 나누어 합하면 글자를 이루고, 한문이든 우리말이든 무엇이든 적을 수 있다. 글자는 간결하나 그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알고 있다. 이 짧은 한 줄이 조정에 알려지는 순간, 진짜 싸움이 시작될 것임을. 사대부들은 이것을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것을 '오랑캐의 글자'라 부르며, 중국을 섬기는 나라의 체면을 깎는 일이라 비난할 것이다.

세종은 촛불을 끄기 전, 스물여덟 자가 적힌 종이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제부터가… 시작이구나."

창밖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지나간다. 궁궐은 아직 아무것도 모른 채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러나 이 작은 방에서 시작된 변화는, 머지않아 조정 전체를 뒤흔들 폭풍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