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소설록

태조 - 에피소드 6: 왕위의 무게 — 새 나라를 세우는 고통

정보알랴주미 2026. 4. 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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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 에피소드 6: 왕위의 무게 — 새 나라를 세우는 고통


태조 2년(1393년) 정월 초하루.

어둠이 아직 걷히지 않은 새벽, 이성계는 눈을 떴다. 창밖으로 희뿌연 겨울 하늘이 보였다. 바람 소리가 처마 끝을 훑고 지나갔다.

왕이 된 지 어느덧 두 번째 해가 밝았다.

그는 침상에서 일어나 천천히 곤룡포를 걸쳤다. 시종들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머리를 매만졌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처음으로 명나라 황제에게서 받은 조복(朝服), 그 화려한 관복을 입고 정전에 올라 신하들의 새해 하례를 받는 날.

이성계는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의 사내는 분명 자신이었다. 그런데 낯설었다. 평생 갑옷을 입고 말 위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던 장군이, 이제는 비단 예복에 옥관을 쓰고 용상에 앉아야 하는 왕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

생각은 잠깐이었다. 이내 정전의 문이 열렸고, 수백 명의 신하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좌시중 조준이 술잔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원정(元正)의 첫날, 신들은 크나큰 경사를 이기지 못하여 삼가 천세를 올리나이다."

"천세! 천세! 천천세!"

신하들의 목소리가 정전 지붕을 울렸다. 그 광경 앞에서 이성계는 표정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왕은 흔들리지 않아야 했다. 그것이 왕의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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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자마자 이성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도읍(都邑) 문제였다.

조선이라는 새 나라가 세워졌지만, 아직도 수도는 고려의 옛 도읍 개경(開京)이었다. 언제까지나 전 왕조의 땅에 새 나라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새 왕조에는 새 도읍이 필요했다.

2월, 왕은 친히 계룡산으로 향했다. 신하들이 만류했다. 현비(顯妃)가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도 있었고, 서쪽 변방에 도적 떼가 출몰한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새 수도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직접 정해야 한다. 내 뒤를 이을 자식이 도읍을 옮기려 해도, 대신들이 안 된다 하면 어찌하겠느냐?"

공신 남은(南誾)이 앞으로 나섰다.

"신들이 비록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해도, 새 고을로 옮기는 것이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송경의 전택(田宅)이야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이성계는 그 말에서 미묘한 뉘앙스를 놓치지 않았다. "경들도 역시 옮기고 싶지 않은 것이지." 그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부터 성씨를 바꾼 새 임금은 반드시 도읍을 옮기는 법이다. 내가 급히 계룡산을 보러 가는 것은, 내 손으로 직접 새 도읍을 정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행렬을 이끌고 계룡산으로 내려갔다. 산세를 살피고, 물길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종묘와 사직의 위치를 마음속으로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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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목소리가 나왔다.

경기 좌우도 관찰사 하륜(河崙)이 상소를 올렸다.

"전하, 계룡산은 나라의 한가운데가 아니옵니다. 남쪽에 치우쳐 동·서·북면과 소통이 어렵습니다. 더욱이 풍수를 살펴보니, 산은 건방(乾方)에서 내려오고 물은 손방(巽方)으로 흘러나가는 형세이니, 이는 송나라 호순신이 이른 바 '수파장생 쇠패립지(水破長生 衰敗立至)' — 물이 장생을 깨뜨리면 쇠락이 곧 온다는 땅이옵니다."

이성계는 그 상소를 읽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미 백성들을 동원해 터를 닦고 있는 중이었다. 번복한다면 그 수고와 비용이 모두 허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체면보다 나라의 미래를 택했다. 권중화, 정도전, 남재 등 핵심 신하들에게 하륜의 주장을 검토하게 했다. 그 결과는 하륜의 말이 옳다는 것이었다.

12월, 이성계는 결단을 내렸다. "계룡산 공사를 중단하라."

명이 내려지자 중외(中外)가 크게 기뻐했다. 백성들이 부역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은 한양(漢陽)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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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읍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도 이성계를 끊임없이 긴장시켰다.

명 황제는 조선에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조선 사신들이 요동에 이르렀다가 입경도 못하고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여진족을 꾀어 사람을 빼돌렸다, 요동 변장을 유혹했다는 등 황제가 거론하는 혐의의 목록은 길었다.

이성계는 직접 긴 외교 문서를 작성했다. 한 구절 한 구절에 진심을 담았다.

*우리는 화하(華夏)를 범하지 않았소. 신우와 정몽주가 요동을 공격하려 할 때, 나는 의리를 들어 그 역행을 막은 사람이오. 황제께서 그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황제의 의심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사신들은 번번이 요동에서 발길을 돌렸다. 관계는 안개 속처럼 불투명했다.

왕 노릇이란 이런 것이었다. 안으로는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고, 밖으로는 강대국 황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그 사이 어딘가에서 옳은 길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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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한양 성벽 공사가 시작되었다. 수만 명의 일꾼들이 돌을 깨고 흙을 날랐다. 이성계는 남산에 올라 직접 성의 기초를 살폈다.

"이 역사(役事)가 제때 끝날 수 있겠소?"

신하 이민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관리들이 공사를 게을리하고, 일꾼들도 성실하지 않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성계는 그 솔직함을 칭찬하며 쌀과 콩 서른 석을 내렸다. 그리고 감찰들을 매일 현장에 보냈다. 게으름을 피우다 걸린 관리 열네 명은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되, 그중 한 명은 강화 수군으로 보냈다. 그것이 경고였다.

왕은 무섭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느슨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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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어느 날, 이성계는 혼자 앉아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장남 방우(芳雨)가 죽었다. 술을 너무 좋아하여 몸을 망가뜨린 탓이었다. 이성계는 3일 동안 조회를 멈추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왕은 크게 통곡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새 나라의 기반이 아직 굳건하지 않은 이 시간에, 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는 조용히 아들의 시호를 '경효(敬孝)'라 내렸다. 경(敬)하고 효(孝)한 사람. 살아생전 그러지 못했더라도, 죽어서라도 그렇게 불리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이었다.

왕위의 무게는, 슬픔조차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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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2년이 저물었다. 계룡산 공사는 중단되었고, 한양의 성벽은 절반쯤 올라가고 있었다. 명나라와의 관계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그리고 이성계의 긴 여정은 이제 막 두 번째 장을 끝내고 있었다.

새벽의 용상은 차가웠다. 그러나 이성계는 앉았다. 그것이 왕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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