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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 12일. 개경(開京).
왕대비 안씨(安氏)의 침전 앞에 신하들이 무릎을 꿇었다.
시중 배극렴(裵克廉)이 입을 열었다.
"지금의 왕은 어둡고 혼미하여 이미 군도(君道)를 잃었습니다. 민심은 떠났고, 사직과 백성의 주인이 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청컨대 폐하소서."
왕대비는 한동안 침묵했다. 창호지 너머로 여름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각, 북천동(北泉洞)의 임시 거처.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에게 교지(敎旨)가 내려졌다.
공양왕은 엎드려 명을 들었다.
"나는 본래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군신들이 억지로 세운 것이다. 내 성품이 총명치 못해 신하들의 마음을 어기는 일이 없지 않았겠는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흘렀다. 몇 줄기가 아니었다. 쏟아졌다.
그렇게 고려왕조 475년이 눈물 속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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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7일 병신(丙申)일. 수창궁(壽昌宮).
그날 아침, 이성계(李成桂)의 사저에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마침 집안 친척 부인들이 이성계와 강비(康妃)를 문안하러 와 있었다. 여자들이 냉수에 말밥을 먹고 있는 평범한 오전이었다.
그런데 밖이 이상했다.
골목마다 사람들이 가득 찼다. 배극렴, 조준(趙浚)에서 시작해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이지란(李之蘭), 장사길(張思吉)까지—대소 신료들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고 이성계의 집으로 밀려들었다. 골목이 꽉 막혔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부인들이 먼저 낌새를 알아챘다.
"어—이게 무슨……?"
비명 소리와 함께 부인들은 북쪽 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성계는 문을 닫았다.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뜻이었다. 오후가 되도록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신하들은 대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며.
그러나 저녁 무렵, 배극렴을 앞세운 신하들이 기어이 문을 밀고 안뜰로 들어섰다.
전국새를 청사(廳事) 위에 놓았다.
이성계는 허둥지둥했다. 이천우(李天祐)에게 몸을 의지한 채 겨우 침실 문을 나섰다. 당황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백관이 일제히 엎드려 절했다.
북이 울렸다.
"만세(萬歲)! 만세! 만만세!"
함성이 수창궁을 뒤흔들었다.
이성계는 몹시 두려웠다. 땅에 숨고 싶었다.
배극렴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나라에 임금이 있는 것은, 위로는 사직을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함입니다. 고려는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거의 오백 년이었으나, 공민왕이 후사 없이 돌아가신 뒤부터 권신들이 요승 신돈의 아들인 우(禑)를 왕으로 속여 세운 것이 벌써 십오 년이었습니다. 왕씨의 제사는 이미 끊겼습니다. 공께서 대의를 먼저 세워 천자의 땅을 범하지 않겠다며 군사를 돌리셨습니다. 이 나라를 공이 아니면 누가 다스리겠습니까?"
이성계는 여러 번 거절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합청(合廳)에서 함께 간청했다.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마침내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모두의 뜻이 이러하니, 내 어찌 홀로 물리치겠는가."
그 순간, 1392년 7월 17일. 조선(朝鮮)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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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나라의 첫 달은 전쟁처럼 바빴다.
팔월에는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세워 개국에 공을 세운 이들을 정리했다. 이성계는 아들들에게 군호(君號)를 내렸다. 방우(芳雨)는 진안군(鎭安君), 방간(芳幹)은 회안군(懷安君), 방원(芳遠)은 정안군(靖安君)이 되었다.
공양왕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어 간성군(杆城郡)에 배치되었다.
새 임금은 날마다 신하들과 마주하며 나라의 틀을 세워나갔다. 관원의 임용 기준을 정하고, 지방 수령의 근무 평가제를 만들었다. 오백 년 고려의 관습 위에 새 제도를 얹는 일이었다.
대사성 유경(劉敬)이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론했다. 왕도정치의 교과서였다. 이성계는 꼼꼼히 들었다.
힘으로 시작했지만,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의 새벽은 아직 낯설고 차가웠다. 가을로 접어들수록 한양(漢陽) 천도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수도를 옮긴다는 것—그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새 왕조가 진짜 시작된다는 선언이었다.
이성계는 낡은 개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기서 새 나라가 시작된다. 아직 두렵다. 그래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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