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0년 음력 2월 17일.
세종 임금이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는다.
서른두 해. 조선이라는 어린 나라가 한 사람에게 통째로 매달려 흘러간 시간이다. 그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 이제 한 남자가 남는다.
세자 이향(李珦), 서른여섯.
훗날 문종이라 불리게 될 그 사람이다.
세자는 아직 등을 펴지 못한다.
그의 등 한가운데에 종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살갗이 채 아물지 않아 옷이 닿을 때마다 따끔하게 살이 당긴다. 의원이 그토록 만류했건만, 그는 아버지의 빈전(殯殿) 앞에서 곡을 멈추지 못한다.
"마마, 이대로는 안 됩니다."
영의정 하연이 또 한 번 같은 말을 꺼낸다.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박종우. 모두 세종이 가장 신뢰하던 대신들이다. 그들이 지금, 다 큰 세자 앞에서 다시 한번 무릎을 굽힌다.
"대행왕(大行王)의 유교(遺敎)에 분명히 적혀 있지 않습니까. 사흘 안에는 죽을, 사흘 뒤에는 가볍게 끼니를 들라 하셨습니다. 그것이 부왕의 뜻입니다."
세자는 고개를 든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눈만 붉다.
"내, 그 가르침을 안다."
목소리가 갈라진다.
"하지만 잠시만, 잠시만 더 있게 해 다오."
대신들은 더 청하지 못하고 물러난다. 노쇠한 영의정 하연마저 등을 돌리며 눈가를 훔친다.
지난 사흘. 세자는 거의 잠을 못 잤다.
세종은 마지막까지 그를 어루만지며 떠났다. 정사를 대리한 지 벌써 다섯 해. 손수 약을 떠넣어 드리고, 진지 상을 살피던 그 손길이 이제 더는 부왕을 쓰다듬지 못한다.
그리고 그 등의 종기.
세자는 알고 있다. 이 종기는 단순히 자기 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조선이라는 거대한 몸의 한복판에서, 그 자신의 등이 곪고 있다는 것을.
***
빈전을 어디에 둘 것인가.
대신들은 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두기엔 뜰이 너무 좁습니다. 비가 오면 호위 군사들이 그대로 비를 맞고, 명나라 사신이 와도 마땅한 예를 차릴 곳이 없습니다. 차라리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연이 먼저 입을 연다.
그러자 공조판서 정인지가 고개를 흔든다.
"아닙니다, 영상. 빈전을 경복궁 동궁의 자선당(資善堂)으로 옮기시지요. 그리하면 세자께서 빈전 앞에서 즉위하시는 도리도 갖춰지고, 백관과 군사의 좁은 폐단도 사라집니다."
이번에는 좌의정 황보인이 정색을 한다.
"정시정종(正始正終)이라 했습니다. 처음과 끝이 한가지여야지요. 동궁으로 빈을 옮긴다는 건, 존(尊)을 비(卑)로 낮추는 일입니다. 의리에 어긋납니다."
예조판서 허후가 보탠다.
"그저 이대로 빈을 모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신이 온다 한들 이곳에서 맞이하면 그만이지요. '궁실을 낮추는 것은 제왕의 미덕이라', 무엇이 흠이 되겠습니까."
세자는 그 모든 말을 듣고 있다.
대신들은 새 임금의 한마디를 기다린다.
"…좁다는 폐단은 작고, 빈을 옮기는 일은 크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연다.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다.
"여기 그대로 빈을 모시도록 하라."
대신들이 일제히 절한다. 하연은 속으로 안도한다. 새 임금은 정시정종의 의리를 안다. 부왕의 빈전 자리 하나에도 아랫사람의 손을 함부로 빌리지 않는다.
이 청년이, 아니, 이 서른여섯의 사내가 조선의 다섯 번째 왕이 되려 한다.
***
그 사이,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다른 종류의 일이 진행 중이다.
안평대군 용(瑢)이 직접 찾아와 청한다.
"형님. 아버님을 위해 금자(金字) 화엄경을 사경하고 있습니다. 종이는 절반을 넘게 다 떴는데, 부족한 황금이 자그마치 마흔 냥입니다. 지금까지 모은 것은 열세 냥뿐. 형님, 부디 부족한 분량을 보태 주십시오. 또 대자암 무량수전이 두 칸뿐이라 비좁으니, 아버님을 위해 한 칸 더 지어 석가·관음 두 상을 모시고 싶습니다."
문제의 신미(信眉) 스님이 안평대군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른다.
세자는 안다. 부왕 세종이 말년에 얼마나 이 승려를 가까이했는지를. 그 신미를 함부로 잡으면, 누가 가장 슬퍼할지를.
세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안평. 청기와 새로 굽는 일은 그치도록 하자. 다른 등롱은 옛것을 손보면 된다. 다만 화엄경 사경은 끝까지 마쳐라. 아버님께서 그것을 보고 가셨더라면 한이 없으셨겠지."
도승지 이사철이 입을 다물고 옆에 선다. 마음 같아서는 척불(斥佛)의 도리를 다시 한 번 아뢰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새 임금의 효심이, 화엄경 사경의 황금 스물일곱 냥보다 더 두텁기 때문이다.
***
정유일(丁酉日).
마침내 그날이 온다.
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춰 입는다. 무거운 옷이 등의 종기를 거듭 누른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그 통증을 삼킨다.
빈전 앞.
세종의 관 앞에서, 세자는 부왕의 명을 받는다. 이것이 조선의 즉위식이다. 새 임금은 죽은 아버지의 관 앞에서 옥새를 받는 것이다.
옥새가 손에 들어오는 순간, 등의 종기가 또 한 번 뜨겁게 욱신거린다.
"…아바마마."
소리가 새어 나오는 줄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뒤에 늘어선 백관이 일제히 절한다. 그 절의 물결 속에서 새 임금은 한참을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문종의 시대가 시작된다.
***
그러나 새 임금의 첫 며칠은 조용하지 않다.
빈전 곁에서 다시 사단(事端)이 자라난다.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이, 그 야무진 얼굴로 사정전 뜰에 선다. 그의 뒤에는 박팽년·하위지 같은 젊은 학사들이 함께 서 있다.
"전하."
정창손이 첫 입을 연다.
"불상을 만들고 경전을 베끼는 일, 대자암을 고쳐 짓는 일에 대해 대신들과 대간이 거듭 아뢰었으나 아직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다시 청합니다. 모든 일을 그쳐 주십시오. 또한 후궁들이 머리를 깎았다는 말이 들리는데, 이는 옛날에도 없던 일입니다. 고려가 불교를 숭상했으되 후궁이 삭발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우리 조선에서는 더더욱 없던 일입니다. 부디 엄히 금하소서."
새 임금은 잠시 말을 잃는다.
이 말이, 그가 처음으로 자기 시대의 신하들로부터 받게 될 직간(直諫)이다.
부왕의 빈전을 모신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그 부왕을 위한 일조차 신하들은 멈추라 한다.
문종은 천천히 입을 연다.
"불사는 선왕(先王) 때에도 그대들이 극론(極論)하였으나 끝내 청을 얻지 못한 일이다. 지금 이 일들은, 선왕께서 이미 마련해 두신 것이다. 절박한 정으로 어찌 차마 그치게 하겠는가. 더구나 대신들과 상의해 행하는 일을, 어찌 가볍게 멈출 수 있겠는가."
정창손은 그 자리에 무릎을 굽혀 다시 청한다.
"전하. 일은 비록 선왕께서 정하셨더라도,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다 따를 수 없습니다. 초상에 토목 역사를 크게 일으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납니다. 종묘·사직조차 무너진 곳이 있어도 차마 손대지 못하거늘, 하물며 불우(佛宇)이겠습니까."
그 단단한 말에, 문종은 한참을 침묵한다.
새 임금은 마음속으로 깨닫고 있다.
부왕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 그리고 자기 시대의 신하들은, 자기 시대의 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인이 다시 헤아려 보겠다."
이 한 마디로 첫 충돌은 일단 매듭지어진다. 그러나 모두가 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
그날 밤. 문종은 빈전 곁의 작은 방에 홀로 든다.
종기에서 흘러나온 진물이 흰 도포 안쪽을 적신다. 그는 그것을 손으로 더듬어 본다. 아프다. 그러나 더 아픈 것은, 어쩌면 등이 아니다.
"아바마마."
그는 어둠 속에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부른다.
"제가… 잘할 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없다.
다만 빈전 쪽에서 백관의 곡소리가 새벽까지 끊이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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